8장: 영어수업에 대한 단상

누구나 국제경쟁력이라는 실용적 가치를 이야기한다. 영어수업을 통해 꾸준히 영어실력을 키워야 국가 간 의존도가 심화되는 글로벌 사회에서 외국인들과 경쟁 또는 협업을 하기 위해서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영어수업이 필수라는 것이다. 글쎄 틀린 말은 분명 아닌데 이게 전부인양 얘기하게 되면 그만큼 한국어 사용을 소홀히 하게 된다 하여 요즘 젊은이들이 한글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부족하다, 한글의 미래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는데..< Going Solo>라는 미국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에릭 클리넨버그(Eric Klinenberg)가 쓴 책이다. 저자의 주장은 이러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미혼, 이혼, 사별 등으로 인해 싱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4배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며 유럽 다양한 국가들과 호주 및 일본의 예까지 들어간다. 이 책에서는 언급이 되진 않았지만 각종 언론에서 보도되었듯이 한국도 급증하는 이혼율 등 혼자 살아가는 인구가 급속히 늘어간 국가에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독신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현상에 대해 기존 학자들은 대부분 공동체성의 와해로 진단을 한다.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자 퍼트남에 따르면 그 유명한 메타포 “Bowling Alone”을 통해 표현하듯이 현 시대 미국인들의 삶은 개인주의가 극대화되고 공동체적인 삶은 소멸되어 간다고 개탄한다. 비단 퍼트남 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대가들 대부분이 이러한 진단에 동의를 하며 각종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그런데 클리넨버그는 조금 다른, 아니 확연히 반대되는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의 주장은 이러한 독신남녀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회변화–즉, 여성 권리의 급격한 신장, 네트워크 통신기술의 발전, 평균수명 연장과 고령화 사회–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라이프스타일이 재편되어 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독신들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 각종 공동체적 삶에 참여하는 독신들의 행동 등 방대한 리서치 결과를 제시하기도 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같은 현상을 두고 이렇게 다르게 즉,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진단할 수가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책의 저자는 분명 독신이 아닌 두 자녀를 가진 한 가정의 가장이므로 절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옹호하려는 동기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또한 책의 결론이 독신의 삶을 미래지향적 모델로 주장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기존의 학자들이 한결같이 싱글족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현상을 두고 위기로 진단하여 섣부른 가치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어 독신들을 사회공동체 붕괴의 주체 또는 피해자로 스티그마를 붙인데 반해, 클리넨버그의 관점은 이러한 현상에서 바로 미래를 읽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Together Alone”이라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전자와 같이 위기로 진단, 네거티브하게 접근하게 되면 그에 대한 처방은 위기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되고 결론은 결국 제로로 되돌아온다. 반면 후자와 같이 긍정적인 마인드로 현상을 진단하게 되면 제로에서 시작하여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모색, 일정 정도의 플러스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해결책이 나오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즐기는 젊은이들, 여럿이 어울리는 카페에서도 각자 스마트 폰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화된 삶의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배우자와의 불화로 결국 헤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도, 혹은 보다 자유롭고 자기 의존적(self-reliant)인 독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는 잠재적 인구이다. 이들을 두고 기성세대들은 요즈음 젊은이들의 삶이 파편화 되어간다고 애석해 하고 있지만 이를 그저 네거티브하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사회 속에서 새롭게 재편되는 삶의 한 단면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과도기의 모습으로 말이다.

사족이 너무 길었다. 영어수업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려는데 얼핏 딴 길로 흐른 것 같지만 <Going Solo>라는 책에서 저자가 취한 태도를 필자도 똑같이 취하고 싶은 욕망에서 책 소개를 장황하게 해버렸다. 영어는 일종의 글로벌 언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로빈슨 크루소우처럼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야 크게 중요하지 않겠으나 (사실 고립된 삶을 살수록 글로벌 언어는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도 얼핏 들긴 하지만), 클리넨버그의 관점을 빌어 영어 사용이 새롭게 재편되는 삶의 방식이라고 진단한다면 우리는 한글 실종을 우려하여 영어 수업을 격하시킬 것이 아니라 보다 바람직한 방향의 영어 수업과 커리큘럼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경쟁력이라는 실용적 가치보다 영어 수업이 필요한 이유로 우선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창의력 증진과 관련해서이다. 영어와 같은 외국어가 인간의 창의력 계발에 미치는 효과는 아마도 언어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논리는 이러하다. 우리의 뇌 속에는 모국어로 습득된 수많은 개념들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학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모국어의 소통이 용이할지 모르나 외국어로 자극을 주었을 때 보다 더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습과 창의력은 어떤 면에서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학습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규범 체계 속에 순화되어 스스로가 알고 있다고 지각(perception)하는 것이다. 창의력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각이 최대한 약화되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인지적 반작용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가능해진다. 상대적으로 외국어는 이러한 인지과정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국어와 같이 뚜렷이 형성된 개념체계가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국어와 외국어를 잘 혼합한 제대로 된 커리큘럼만 수립한다면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영어 수업이 학습 증진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필자가 영어 강의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볼 때 콘텐츠의 효과적인 전달만 전제가 된다면 학생들의 학습 수준 역시 한국어 강의 때와 비교하여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영어 수업이 학습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인지구조적 논리보다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 수업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필자는 2010년부터 학부와 대학원 전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고 있다. 강의와 토론에 방점을 두는 영어 수업이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뉴스에 대해 공부하는 저널리즘을 가르치는데 왜 굳이 영어가 개입되는가 혹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변화하는 저널리즘의 지형을 제대로 이해할 때 의문이 해결될 수 있기에 다음 기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설명을 하고자 한다. 간단하게만 이야기 하면 네트워크의 발달과 플랫폼의 다양화에 따라 뉴스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할 정도로 저널리즘의 지형이 변하고 있고, 이제는 글로벌화된 새로운 언론의 미래가 열려 있다는 정도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여하튼 필자가 우리 학생들과 영어 수업을 통해 획득한 경험에 바탕 하여 이야기를 하자면, 언어는 철저히 자신감과 솔직함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다소 수줍어하던 학생들에게 영어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영어를 못하는 것 때문에 창피함이나 열등감을 갖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였다. 그 결과 학생들은 투박해도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개중에는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유창한 네이티브들도 몇 명 있었으나 필자의 학생들에 대한 평가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생각의 질(quality)에 맞춰 졌다. 클라스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으나 요즈음 같은 경우 필자가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면 한 번에 열 너 댓 명이 경쟁적으로 손을 들고 먼저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렇게만 적극적이라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 단일민족 최대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인도인들보다 훨씬 경쟁력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MIT 인지과학 교수 스티브 핀커가 쓴 <언어본능>이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네이티브와 같은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는 수화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태어나면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성장기를 다 지나 수화를 배운 일반인들은 그 표현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강해서 네이티브 수준의 소통 능력을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영어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 치면 깊은 열등감에 빠지곤 한다. 이런 태도는 영어를 너무 높게 보는 사대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럽의 사람들은 문법도 엉망이고 어휘력도 별반 높지 않지만 표현력에 있어서는 나름 뛰어난 영어 실력을 보여준다. 영어에 대한 열등감과 사대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모방의 행위이긴 하지만 행동이나 바디랭귀지, 불필요한 연결어까지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적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최대한 명확히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일 뿐 미국화(Americanized) 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한 모습이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심할 경우에는 오히려 귀에 거슬리기까지 하다. 다행히도 우리 학생들은 필자의 질문에 눈동자를 굴려가며 열심히 상상하였고, 그 내용을 정갈하고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논리적으로 표현하였다. 진정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창의적으로 열심히 학습하고, 다른 동료 학생들과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보완해주기도 하는 이 영어 토론식 수업을 통해 진정으로 성장한 것은 필자 자신이었다. 누군가 인생에서 배울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했던가. 수업 중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여느 기성학자 못지않은 진취적이고 성숙한 시각이 표출되어, 필자가 5년에 걸쳐 얻은 석,박사학위와 매년 자의 반 타의 반 열심히 연구한 탓에 얻은 학문적 이론의 기초가 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였다. 이처럼 필자의 영어 수업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는 결국 Going Together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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