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대학교수 삶의 마침표

내가 대학교수직을 그만두었을 때 주위에서는 다들 내가 미쳤다고 했다. 남들은 못되어서 안달인 철밥통 교수를 왜 그만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내 결정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  다만 아쉬워 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세상의 빛을 못 본 내 연구업적들과 이제 그야말로 완전한 이별을 해야 할 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실 교수로서 승진과 재임용심사의 기준이 되는 연구에 열심히 매진을 해오면서도 나는 항상 가슴 한편에 연구에 대한 가소로움과 실망을 금치 못하곤 하였다. 이 가소로움과 실망은 솔직히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며 학자들의 연구논문을 처음 접하면서 든 생각이기도 하였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왜 학자들은 대단한 연구 결과인양 떠들어 대는 것일까.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을 업으로 삼아 십 여 년간 접해온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를 해보자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연구문제를 학문분야에서 정해놓은 과학적 테두리 안에서 입증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상의 가치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라는 직분을 유지하기 위해선 나도 정해진 틀 안에 나의 학문적 호기심을 항상 맞출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싣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아쉬워하는 내 연구업적은 어떤 이유에선지 오히려 세상의 냉대를 받아야 했던 조금은 튀는 아이디어들이다. 세미나에 발표를 하려고 혹은 학술지에 게재하려고 제출을 하면 항상 거절을 당해야 했던 나의 소중한 아이디어들 말이다.

내가 1996년에 미국에서 언론학 석사과정을 시작하며 학문의 길에 접어들었으니 여기 기록될 내 아이디어들의 시초는 아마도 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동전 몇 개를 앞에 두고 고안해 낸 인간의 의사결정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이 내 튀는 아이디어들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다. 운이 좋게도 무사히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의 대학교수가 되어 나는 이 수학적 모델링에 바탕을 둔 내 이론을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인 <네이쳐>지와 <사이언스>지에 제출했다가 거절당했다. 내 이론이 거부당했다는 데에 크게 울분을 느끼지 않은 것은 <네이쳐>와 <사이언스>가 워낙 어마어마한 학술지라서 내 이론이 그에 걸맞지 않다는 스스로의 자조 섞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그때까지 수도 없이 내 나름의 ‘역작’들이 국내외의 학계에서 거부당했기에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그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지 못했다는 데 울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내 아이디어에 대한 전문가들의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네이쳐> 전에 제출했다가 거절당한 심리학 분야 국제학술지의 미국인 편집장이 내 논문에 대해 마치 현대 심리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레빈(Lewin)을 보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해줬을 뿐 나는 내 논문의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이제껏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평가는 제대로 해줘야 되는 것 아닌가. 평가를 해줘야 나도 발전을 할게 아닌가. 그게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일반 대중들에게 손을 내민다. 어차피 교수라는 직분도 벗어버린 김에 나는 학계의 고루한 시선과 관성을 내가 과감히 거부하기로 하였다.

내용적으로 볼 때 내가 애착을 가졌던 아이디어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미래를 향하지 않았나 싶다.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상관없이 나의 생각들은 항상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나는 이 변화를 미래의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 미래를 이야기 한다. 미래를 대비해야 선도적인 인간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래는 구체적으로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당장 앞으로 한 시간 뒤도 내일도 미래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가까운 미래가 십 년 뒤나 백 년 뒤처럼 먼 미래와 똑같은 무게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시기를 구분한다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이 명쾌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관념 속에서 한 시간 후나 내일은 동시대로 규정되지 지금의 화두가 된 미래로 규정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리에 박혀있는 미래라는 개념은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삶의 방식이 작동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고 당장 내일 경천동지할 삶의 혁신이 이루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라는 의미를 시간의 차원에서 규정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삶과 큰 괴리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미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우리는 현재를 파악하고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라는 화두에 몰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많은 이들이 먼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시대에 대해 잘못 예측했다고 하여 누군가 무덤까지 쫓아와 비난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떠든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한 해 한 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미래에 대한 고찰은 변화를 예측한 후 자신의 비전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래에는 항상 예측이 쫓아 다닌다. 어찌 보면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의 정확성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측에는 상당한 수동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예측한다고 하진 않는다. 예측의 대상은 언제나 타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가 불투명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우리의 우려는 결국 자기주도의 미래에 관한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미래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면 굳이 예측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우리의 갈 길을 가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시점, 아직은 나의 미래에 관한 구상이 100퍼센트 완성되었다고 보기 힘든데다가 독자들에게 미래에 관한 나의 견해를 발표하기 전에 나에 관한 소개를 먼저 하고 싶어졌다. 한낮 공상에 불과할 것 같았던 변화에 조응하고자 했던 나의 생각들을 순수한 마음을 가진 대중들 앞에서 솔직히 독백하고 싶다. 나는 전문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는 사회의 상층부를 점하고 있는 자들보다 선입견이 상대적으로 작아서 변화에 민감한 일반 대중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발전시키는 순수한 역군들이라고 본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진 이들을 찾아서 내가 떠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쓸모 있는 아이디어라는 평가를 받는 다면 지난 십 년 간 학계에서 고군분투했던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싶다. 엉뚱한 공상가였지만 앞으로는 보다 인간중심적인 미래를 일구어 내는데 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되리라 단호한 결심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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