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학교수 삶의 마침표
- 내 인생의 굴레, 인문학
- 휴머니즘이 결합된 IT를 제안하며
- 소셜콘텐츠는 바보상자를 극복하는 길
- 수다가 아닌 대화를 위한 문화예술과 ICT 융합
- 대화적 뉴스를 만든 나의 무의식
- 영어 수업에 대한 단상
- 사회격과 커리어 코치
- 휴머니스틱 IT 기업을 창업하며
저자 김민하 / 출간일 2015. 11. 6 / 출판사 아포코
대학교수 삶의 마침표
내가 대학교수직을 그만두었을 때 주위에서는 다들 내가 미쳤다고 했다. 남들은 못되어서 안달인 철밥통 교수를 왜 그만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내 결정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 다만 아쉬워 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세상의 빛을 못 본 내 연구업적들과 이제 그야말로 완전한 이별을 해야 할 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실 교수로서 승진과 재임용심사의 기준이 되는 연구에 열심히 매진을 해오면서도 나는 항상 가슴 한편에 연구에 대한 가소로움과 실망을 금치 못하곤 하였다. 이 가소로움과 실망은 솔직히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학문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며 학자들의 연구논문을 처음 접하면서 든 생각이기도 하였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왜 학자들은 대단한 연구 결과인양 떠들어 대는 것일까.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을 업으로 삼아 십 여 년간 접해온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를 해보자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연구문제를 학문분야에서 정해놓은 과학적 테두리 안에서 입증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상의 가치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라는 직분을 유지하기 위해선 나도 정해진 틀 안에 나의 학문적 호기심을 항상 맞출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싣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아쉬워하는 내 연구업적은 어떤 이유에선지 오히려 세상의 냉대를 받아야 했던 조금은 튀는 아이디어들이다. 세미나에 발표를 하려고 혹은 학술지에 게재하려고 제출을 하면 항상 거절을 당해야 했던 나의 소중한 아이디어들 말이다.
여기 기록될 내 아이디어들의 시초는 아마도 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동전 몇 개를 앞에 두고 고안해 낸 인간의 의사결정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이 내 튀는 아이디어들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다. 운이 좋게도 무사히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의 대학교수가 되어 나는 이 수학적 모델링에 바탕을 둔 내 이론을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인 <네이쳐>지와 <사이언스>지에 제출했다가 거절당했다. 내 이론이 거부당했다는 데에 크게 울분을 느끼지 않은 것은 <네이쳐>와 <사이언스>가 워낙 어마어마한 학술지라서 내 이론이 그에 걸맞지 않다는 스스로의 자조 섞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그때까지 수도 없이 내 나름의 ‘역작’들이 국내외의 학계에서 거부당했기에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그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지 못했다는 데 울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내 아이디어에 대한 전문가들의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네이쳐> 전에 제출했다가 거절당한 심리학 분야 국제학술지의 미국인 편집장이 내 논문에 대해 마치 현대 심리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레빈(Lewin)을 보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해줬을 뿐 나는 내 논문의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이제껏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평가는 제대로 해줘야 되는 것 아닌가. 평가를 해줘야 나도 발전을 할게 아닌가. 그게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일반 대중들에게 손을 내민다. 어차피 교수라는 직분도 벗어버린 김에 나는 학계의 고루한 시선과 관성을 내가 과감히 거부하기로 하였다.
내용적으로 볼 때 내가 애착을 가졌던 아이디어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미래를 향하지 않았나 싶다.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상관없이 나의 생각들은 항상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나는 이 변화를 미래의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 미래를 이야기 한다. 미래를 대비해야 선도적인 인간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래는 구체적으로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당장 앞으로 한 시간 뒤도 내일도 미래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가까운 미래가 십 년 뒤나 백 년 뒤처럼 먼 미래와 똑같은 무게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시기를 구분한다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이 명쾌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관념 속에서 한 시간 후나 내일은 동시대로 규정되지 지금의 화두가 된 미래로 규정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리에 박혀있는 미래라는 개념은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삶의 방식이 작동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고 당장 내일 경천동지할 삶의 혁신이 이루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라는 의미를 시간의 차원에서 규정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삶과 큰 괴리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미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우리는 현재를 파악하고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라는 화두에 몰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많은 이들이 먼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시대에 대해 잘못 예측했다고 하여 누군가 무덤까지 쫓아와 비난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떠든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한 해 한 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미래에 대한 고찰은 변화를 예측한 후 자신의 비전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래에는 항상 예측이 쫓아 다닌다. 어찌 보면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의 정확성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측에는 상당한 수동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예측한다고 하진 않는다. 예측의 대상은 언제나 타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가 불투명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우리의 우려는 결국 자기주도의 미래에 관한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미래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면 굳이 예측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우리의 갈 길을 가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시점, 아직은 나의 미래에 관한 구상이 100퍼센트 완성되었다고 보기 힘든데다가 독자들에게 미래에 관한 나의 견해를 발표하기 전에 나에 관한 소개를 먼저 하고 싶어졌다. 한낮 공상에 불과할 것 같았던 변화에 조응하고자 했던 나의 생각들을 순수한 마음을 가진 대중들 앞에서 솔직히 독백하고 싶다. 나는 전문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는 사회의 상층부를 점하고 있는 자들보다 선입견이 상대적으로 작아서 변화에 민감한 일반 대중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발전시키는 순수한 역군들이라고 본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진 이들을 찾아서 내가 떠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쓸모 있는 아이디어라는 평가를 받는 다면 지난 십 년 간 학계에서 고군분투했던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싶다. 엉뚱한 공상가였지만 앞으로는 보다 인간중심적인 미래를 일구어 내는데 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되리라 단호한 결심을 하면서 말이다.
내 인생의 굴레, 인문학
지금은 이용자 편의를 한층 높인 스마트 기반 컴퓨터들이 대세이지만 대학을 다닐 때 즈음 막 초창기 PC를 접했던 나는 컴맹에 속했다. 대학 때 과학도 공학도 전공하지 않았기에 더군다나 돈벌이 안되고 가난한 학문이라는 인문학도 이었기에 아무도 내가 기계치라는 사실에 의문을 달지 않았고 비난도 하지 않았다. 다만 기계와 소통이 안 되는 때에 불편함을 경험했을 뿐이다. 불편함은 내가 감수해내면 그만이지만 정말 안타까운 점은 내가 아무리 미래가 어떻고 과학이 어떻고 하며 떠든다 한들 아무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컴퓨터도 모르는 기계치 인문학도 출신이 무슨 과학을 논하는가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미래에 관해 계속 떠들고 싶다. 나의 <미래독백> 시리즈 집필이 끝나는 시점에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과연 사람들이 냉소적일까 하는 특유의 승부근성이 가물거리며 피어 오르기도 하거니와 나름 내가 부여한 사명감을 실현하기 위해 마구 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명감. 나는 지금도 후회로 점철된 내 과거를 돌아볼 때 유일하게 잘했다고 생각되는 점이 인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다. 한 때는 내 커리어 쌓기에 큰 난관이 되기도 했다. 특히나 학문적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언론학자였던 나는 나의 학부 전공이 언론학이 아니라 미술사학이라는 사실만으로 알게 모르게 배척을 당했다. 일단은 촘촘한 인맥의 파워를 전혀 누릴 수 없었다. 능력과 성과로 평가되기 보다는 어느 대학 언론학과 출신이더라 라는 식의 인맥으로 얽혀있는 이 나라 학계에서 나는 홀로서기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게다가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의 특이함이 또한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미래의 비전이 없고 인기도 없다는 인문학 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학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부터 나는 전공이 뭐냐는 질문에 답을 하면 미대 출신이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도 했다. 특히나 언론학자로서 커리어를 쌓는데 장애가 된 이유는 우리 사회 특유의 예술에 대한 천시 풍조가 한 몫을 했다고 본다. 환쟁이 학문 공부한 사람이 무슨 언론을 논하는가 하는 식의, 지금 내가 보기에는 한없이 무식하고 저열한 대우를 받아내야 했다. 이처럼 어렵게 학계를 버텨오면서도 나는 한번도 내가 공부했던 대학시절에 대해 후회를 하지 않았다. 쿰쿰한 책 냄새 속에서 베어 나오던 인간과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자유와 평등과 행복과 미래에 대한 선조들의 논의가 내게는 그저 낭만이었다. 강의실과 인문대 교정에서 우리 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그 낭만의 시절은 나의 인격과 소양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여 이후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난의 시기에 그래도 반듯한 판단을 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 낭만의 시절이 한없이 그립고 고마운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이처럼 한없이 천대받던 인문학이 요즘 조금 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부 IT 리더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람에 창의적 리더십을 위한 소양으로 지위가 격상된 것 같다. 다행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인문학은 여전히 교양을 쌓는 학문 정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기업 대표들이나 IT 기술자들이 가끔씩 봐야 하는 책 한 두 권 정도를 채우는 내용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재의 인문학의 여전한 지위다. 사실 그나마 고마워해야 할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주목해야 할 변화는 과학기술이 창조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기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하드웨어라고 일컬어지는, 공학적 공법만 갖추었다면 충분히 생산 가능한 기계가 우리 사회의 수요를 창출하기 에는 세계가 너무나 앞서 진화하고 있다. 과거에 의, 식, 주를 해결하는데 집중되었던 인간 사회가 지금은 매우 다양한 지점에서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 단순히 의식주를 소유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누리고 사는가에 사회적 관심과 요구가 발생하다 보니 단순히 하드웨어적 상품을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비즈니스의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교육과 문화와 여가 등 서비스업 중심으로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 분야에 접목된 과학기술의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요사이 IT 기업들은 한결같이 소프트웨어에 집중하고 있고 사회는 융합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가령 무엇을 생산하던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야 할진대 사람들의 니즈와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에 관한 학문, 즉 인문학에 뿌리를 둔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바람직한 IT 리더상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IT 리더는 말 그대로 인간 사회에 보다 나은 삶의 방식을 산출하기 위하여 IT를 이용하는 비즈니스 영역의 리더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가진 IT 리더에 관한 스테레오 타입은 공학도 출신의 과학기술자이고 많은 IT 기업들의 대표가 엔지니어 출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입관은 IT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무엇이고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부재한 결과이다. 지식은 단기간 내 연마가 가능하다. 인문학 서적 한 두 권, 컴퓨터 언어 및 프로그래밍 서적 한 두 권으로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지식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이렇게 지식의 연마를 통해 배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은 지식의 측면과 인성의 측면이 있다고 본다. 나는 제대로 된 IT 리더들은 인성의 측면이 지식을 압도한다고 단언한다. 가령 내가 가진 과학도들의 이미지는 마니아이다. 조립식 장난감에 심취하여 로봇의 탄생을 꿈꾸던 아이들이나 나무 넝쿨 밑이나 습한 냄새 가득한 지하실 어딘가 혼자만의 실험실을 가지고 있던 꼬마 과학자들이 나에게는 과학기술자의 소양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장하여 과학기술적 지식을 연마했기에 과학자로 보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과학기술자로서 이 세상의 진보에 기여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과학자로 본다. 무언가에 미치고 마는 마니아적 열정 말이다. 인간의 편안하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바치겠다는 인성을 가진 과학도들에게 굳이 인문학적 지식을 쌓으라고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인문학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통해 내려져 온 인간의 본성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 중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진 진정한 인문학도라면 비록 기능적인 면에서의 지식은 얕을지라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비전과 미래에 대한 선구안을 능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요점은 전공 학문의 영역이 IT 리더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인성에 바탕을 둔 열정이 이 사회의 진보에 기여하는 IT 리더를 탄생시키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공학문에 연연해 한다면 소위 말해 가방 끈 짧다는 직업 고등학교 출신 혹은 불우한 환경으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이들은 평생 IT 관련 창업을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마치 발효식품과 같이 장기간의 숙성이 필요한 것이 인성일진대 인문학적 리더십과 과학자적 소양을 단기간 내에 연마할 수 있는 지식으로 접근하면 이들이 오랫동안 스스로 배양해온 열정과 소양을 인정받을 길이 없어지고 만다. 무엇인가에 미쳐서 뛰어난 집중력과 추진력을 발휘하는 능력, 즉 열정은 단지 종잇장에 불과한 학위증서나 책 몇 권, 강의 몇 번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서부터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고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일찍 계발하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입시 교육 위주의 우리 사회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좁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겪는 시행착오의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 역시 입시 교육 중심의 중, 고교 커리큘럼으로 인해 정작 제쳐두었던 나 자신과 인간과 사회와 세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인문학도로서의 삶을 통해 그나마 사그러들 수 있었던 열정의 불씨를 발견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인문학은 절대 교양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덤으로 갖춰야 할 지식도 소양도 아니다. 아마도 IT 리더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문학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통찰력을 말하는 것일 거다. 우리 사회를 보다 인간 중심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한국일보 기고/5월 29일] 창의적 리더십, 메타인지 계발에서부터
기사입력 2010-05-28 13:57 | 최종수정 2010-05-28 21:42
자유 토론에 익숙지 않은 동양권 학생들이 영미 국가에 유학 가서 느끼는 상실감은 실로 엄청나다. 물론 언어적 한계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데 실패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창의적 리더십의 부재다.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창의적 사고, 자신감 있는 의견 표현, 타인을 설득시키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술 등은 주입식, 암기식 교육으로는 배양되기 힘든 능력이다. 게다가 위계적인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기존 이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오고가는 영미식 교육의 장에서 어느덧 이방인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리더십 발현에 소극적인 학생들을 바라보며 교육자로서 인재양성을 고민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학습능력과 창의적 사고의 적절한 균형이다. 잠재된 창의력을 십분 이끌어내고 효과적인 학습능력으로 이를 견인함으로써 사회적 효용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지름길, 즉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가장 시급한 전략은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계발이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통합적 인식을 바탕으로 최적의 문제해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식, 동기, 정서, 경험 등 자신이 가진 인지 기능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메타인지라고 한다. 메타인지의 발달은 창의적 사고의 발현과 이를 정교하게 다듬는 학습동기를 함께 유발하고, 내재된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논리력으로 집단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리더십, 즉 창의적 리더십의 인큐베이터가 된다고 하겠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메타인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길러진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창의력의 발현이 가장 중요하게 간주된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통신 기술의 혁명을 이끈 과학자들이 한결같이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을 주창하는 이유는 바로 그간의 과학기술 발전이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기술’이었다는 점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명은 단순히 기술의 혁신이 아니라 인류 커뮤니케이션의 혁신이었고,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대표되는 ‘애플’발 모바일 혁명 역시 시공간을 초월하는 휴먼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는 것과 함께 메타인지를 계발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귀납적 진리추구 방식이다. 대부분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은 먼저 검증된 이론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서 그 이론의 적합성을 강화해 나가는 연역적 방식을 취한다. 반면 귀납적 방식의 교육은 다양한 사례와 경험을 공유하면서 이론적 틀을 완성해 나가는 보다 열린 의사소통 구조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위계적인 연역적 진리 추구방식에 비해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역동적인 논의의 장을 형성하기가 수월해 진다. 아무런 정답이 제시되지 않았기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오고가고, 적절한 조율이 이루어진다면 현실 적합성 측면에서 완성도가 훨씬 높은 이론을 수립하는 최적의 조건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메타인지 계발을 통한 창의적 리더십 구현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관성적 조직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금의 시대는 절대적 진리에 복속하는 암기형 리더가 아니라 개방적 의사소통 구조를 통해 부패한 관행을 끊고 미래지향적 조직 문화를 이끄는 창의적 리더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휴머니즘이 결합된 IT를 제안하며
나는 2013년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에 논문을 발표하려고 제안서를 제출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SNS의 패러독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 본 자아커뮤니케이션과 사회적 관계>라고 제목 붙여진 논문이다. SNS의 본질을 관계의 형성과 확장에 두고 있었던 기존의 시각에 대해 나는 정체성을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자아커뮤니케이션적 동기와 욕구가 강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관계의 양적 확장 보다는 질적 발전이 이 같은 자아실현 욕구 동기에 더 호응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사회과학적 고찰이 아닌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연구해 보려고 하였다.
SNS의 패러독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자아커뮤니케이션과 사회적 관계
사회적 관계망 형성의 잉큐베이터라고 일컬어지는 SNS에 대해 기존 사회과학자들은 그 본질을 관계의 확장과 형성에 두고 있었다. Small World Network, Six Degrees of Separation 등 소셜네트워크 기반의 이론들이 주목받은 이유는 SNS가 이처럼 개인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과 확장을 가속화시켰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모바일 메신저까지 확장되어 가는 SNS를 이용자들이 어떠한 동기와 욕구에서 이용하는지를 세밀히 분석해 볼 때 오히려 관계의 확장 보다는 정체성을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자아커뮤니케이션적 동기와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SNS를 통한 자아 실현의 욕구에 대한 고찰은 기존의 행동주의(behaviorism)적 이론에 기반을 둔 사회과학적 접근방식보다는 긍정적 자아를 표출하는 욕구발전의 단계를 이론화한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수행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연구는 매슬로우(Maslow)와 로저스(Rogers)등이 주창한 인본주의 심리학(humanistic psychology)적 관점에서 어떻게 자아커뮤니케이션의 욕구가 사회적 관계의 형성으로 확장되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개인의 자아가 가진 가능성에 주목하고 사회적 집합체의 발전과 진화를 자아 실현 욕구의 결정체로 보는 인본주의 심리학은 그 명칭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역사발전 단계의 르네상스기에서 엿볼 수 있었던 인문학적인 접근방식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자아는 고립된 좁은 의미의 자아가 아니라 외부세계를 투사하는 메커니즘의 렌즈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즉, 건강한 자아가 형성될수록 건강한 메시지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관계의 질적 발전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또 한 가지 사회과학자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SNS의 패러독스는 관계의 질적 발전이 관계의 양적 확장보다는 자아실현 욕구 동기에 더 호응한다는 사실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처럼 SNS의 패러독스와 관련된 두 가지의 연구문제를 던진다. 첫째, SNS의 이용자들이 자아실현에 기반을 둔 자아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구가 사회적 관계 형성에 대한 욕구를 압도하는가. 둘째, 관계의 양적 확장에 비해 관계의 질적 발전을 이룰 경우 지각되는 욕구 충족의 수준이 더 높은가. 이 두 가지 연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존의 행동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과학적 방법론 보다는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을 활용하여 SNS의 패러독스에 대한 심층적인 해부를 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개별 이용자들의 이용 충족도가 훨씬 신장된 SNS 플랫폼과 콘텐츠를 구축하는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질 것이라고 기대된다.
(작성일: 2013년 4월 9일 화요일 오전 10:04:13 )
지원 논문이 모자라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왜 탈락을 했는지 의문이었지만 나는 발표의 기회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휴머니즘, 즉 인문주의와 IT에 관한 관심은 지속되었고, 당시 한창 IT 업계에서 키워드로 등장한 사물인터넷이란 명칭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기고문을 신문에 내었다.
[경향신문 기고/2014. 9. 14] 사물인터넷의 개명을 요구하며
모든 사물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인간의 조작 없이 정보를 주고받게끔 하는 시스템을 사물인터넷 또는 만물인터넷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처음에 사물인터넷의 정의를 접했을 때는 솔직히 말해 무슨 뜻인지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았다. 도대체 전자동화(automation)라는 의미 이상의 것이 사물인터넷에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언어의 유희라는 나름의 섣부른 판정까지 내리기도 했다.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사물들이 인터넷을 하면 앞으로 인터넷을 사물들에 판매한다는 것인가. 즉 시장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사물들이란 것인가. 공학적 마인드가 부족해서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나름 인간과 과학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지 어언 20년에 접어든 중견학자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라면 그 명칭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인터넷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코드가 달라서일까.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뒤진 사물인터넷 정의 글귀를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물인터넷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아무리 발전된 기술이라 할지라도 선형적 발전을 거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테크놀로지의 원형을 추적해 들어가면 현 단계의 발명품은 반드시 그 전조 내지 모태를 품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그렇고, 세탁기가 그렇고, 냉장고가 그렇다. 모터와 프레온가스라는 촉매제가 있어서 발명이 가능해졌을지라도 필자가 보기에 이들 발명품은 그다지 혁명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만큼은 달랐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혹자는 구텐베르크에 의해 이룩된 인쇄술이 종이 매체를 낳았고, 그것이 점차 전자화된 것이 인터넷이라고 ‘격하’시킬 수도 있겠지만, 인터넷이 인간 사회에 던진 충격적 여파는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하기에 그러한 주장은 곧 설득력을 잃는다.
인터넷이 혁명적인 이유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 인터넷이 앞서 말한 자동차·세탁기·냉장고와 다른 이유는, 전자가 소프트웨어 기반이고 후자가 하드웨어의 대명사들이라는 구분을 떠나서라도, 전형적인 인간 주도형의 테크놀로지라는 점이다. 물론 요즈음의 자동차는 소프트웨어적 기술 없이는 작동이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 주도형의 과학적 산물은 아니라는 데서 인터넷과 운명을 달리한다. 아마도 수년 내에 우리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자동차가 대중화되리라 전망한다. 이같이 전자동화된 자동차가 사물인터넷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우선 앞서기도 하는 이유이다.
앞서 말한 인간 주도형의 테크놀로지를 달리 표현하면 소비자 주도형의 테크놀로지다. 인터넷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하는 이유를 필자는 바로 이 점에서 찾는다. 인터넷의 주도권은 언제나 소비자에게 있었다. 소비자가 이용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는 무한공간이 바로 인터넷인 것이다. 인터넷이 무궁무진한 편리와 찰나의 속도를 가능하게 한 점에서는 다른 하드웨어적 기술과 다름이 없지만 인터넷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소비자였던 것이다. 사물이 이러한 인터넷의 주체가 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마도 쉽사리 이해를 못했던 이유는 소비자들이 소외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지 싶다.
센서가 부착되어 사물들 간에 정보가 교환된다는 것을 두고 사물인터넷으로 포장하는 것은 마케팅의 일환일 뿐 테크놀로지의 진정성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위해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키고 있는지의 철학적 고민이 필요하다. 무조건 앞선 편리와 속도를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기보다는, 그간 호응을 받았던 테크놀로지는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인간을 위한 기술’로 존재해왔다는 철학을 정보기술(IT) 업체들이 각인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창조하는 공간인 인터넷을 자동화 시스템을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휴머니즘이 결합된 IT라는 철학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 오류이지 싶다.
나는 인간중심적 사회를 디자인 하기 위한 휴머니스틱 IT를 실현하고자 마음 먹었다.
소셜콘텐츠는 바보상자를 극복하는 길
나는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마리텔의 특징 중 하나는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SNS를 통해 보낸 메시지가 방송 전파를 탄다는 사실이다. SNS를 통해 시청자들이 방송제작에 참여하는 혁신적인 포맷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분이 묘한 이유는 바야흐로 5년 전인 2010년도에 내가 언론계와 학계에 발표한 소셜콘텐츠론이 현실화 된데 대해 기뻐해야 할지 애석해 해야 할지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인간은 누구나 최초가 되고 싶어한다. SNS를 이용한 시청자들의 방송제작 참여를 주창한 소셜콘텐츠론은 내가 당시 방송의 날을 기념하여 KBS가 개최한 심포지움에서 최초로 발표한 이론이다. 실상 그전까지는 소셜미디어라는 개념만 존재했을 뿐 소셜콘텐츠라는 개념 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이다. 당시 나의 생각은 전문가들이 방송콘텐츠를 제작하여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는 일방향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SNS를 이용하여 시청자들이 함께 제작하는 참여적 모델의 콘텐츠 생산방식에 방점을 두었다.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이용해서 생산한 콘텐츠이니 이름을 소셜콘텐츠라고 붙이기로 하였다. KBS 심포지움에서 첫 번째 연사로 등장한 나는 이러한 SNS를 이용한 참여적 방송콘텐츠 생산 방식을 한국의 공영방송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문제는 그 후에 있었다.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논문을 KBS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와 단행본에 싣고자 지원했으나 나의 논문을 선정했었던 바로 그 KBS가 거부를 하는 황당한 경우를 경험했다.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나의 이론이 기술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한낮 공상에 불과했던가 하는 생각에 낯이 뜨거워질 따름이었다. 그래도 나의 연구는 계속되었고 같은 해 10월 한국방송학회 가을철 정기학술대회에서도 역시 소셜콘텐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소셜콘텐츠와 한국 공영방송의 글로벌 경쟁력: 콘텐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융합>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그리고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언론학 분야 학술지에 게재를 하는 것으로 나의 소셜콘텐츠론을 마무리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나서 5년이 흐른 지금 나는 나의 이론이 방송사들 여기 저기서 실현되는 양상을 목격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 사실이다. 절찬리에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있는 포맷의 제작방식이라면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웃어야 하겠지만 최초로 아이디어를 고안해 낸 나를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척 실망스럽긴 하다. 게다가 출간과 관련한 당시 KBS의 부당한 평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는 몰라도 현재 방송사에서 SNS를 활용하는 방식은 나의 아이디어를 정확히 구현한 사례는 아니라고 본다. 그건 아마도 내가 왜 소셜콘텐츠를 만들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게다. 나는 지금도 소셜콘텐츠가 바보상자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지만 지금의 방송콘텐츠는 시청자들이 SNS를 이용할 뿐이지 여전히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상자일 뿐이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아니, 한 개의 역할이 더 추가된 것 같기는 하다. 들러리의 역할.
수다가 아닌 대화를 위한 문화예술과 ICT 융합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의 실체는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인가. 대학 강단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친 지 어언 7년째에 접어들며 뉴스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그림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안식의 시간 1년. 파리에서의 삶은 이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여유를 주었습니다. 사람을 보았고, 자연을 보았고,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여정을 꿈꾸었습니다. 아직은 완전한 답을 찾지는 못했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림의 대상은 보여지는 것이 아닌 보는 것, 느껴지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라는 차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능동적인 삶.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조심스레 옮겨놓기로 하였습니다. 비록 흰색의 평면이지만 캔버스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캔버스의 자유로움을 통해 인간의 오감이 입체적으로 교차하는 미래를 꿈꾸며 사람을 그리고 자연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자 합니다.
2013. 9. 18-23 제1회 김민하 개인전 <사람과 자연, 그리고…>에 앞서 쓴 초대의 글
나는 2013년도 9월에 화가로 데뷔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그로부터 두 해전인 2011년의 일이었고 2012년에 파리로 안식년을 가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었다. 대단한 화가가 되려 했다기 보다는 그저 그림 그릴 때만큼은 마음이 평온해 져서 좋았고 머리를 쓰지 않고 그저 손 가는 데로 색깔과 도형이 창조되는 활동이 멋졌을 따름이었다. 인사동의 유명 미술관이 운 좋게 내 포트폴리오를 승인하였고 안식년을 다녀온 일년 뒤에 나는 드디어 화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사실 내 그림을 전시회를 통해 대중들에게 내놓을 때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문 화가들이 내 그림을 보았을 때 느낄 실망감이 앞서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사명감으로 덧입힌 내 특유의 배짱이 당시에도 나를 이끌었다. 나 같은 아마추어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이 땅의 문화예술이 발전하지 않겠는가 하는 아전인수격의 사명감 말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창작활동에 전념하는 예술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전시를 하고 보니 그림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태도 또한 빈번히 접할 수 있었다. 예술인들의 입장에서는 창조적 예술활동이 밥벌이가 안 된다는데 애석함을 느끼곤 했다. 교수를 그만두기 전 사람들이 화가로 직업을 전향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나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겁지만 그것이 업이 된다면 계속 즐거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며 나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그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내 그림의 경향이 대중추수적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예술가로서의 원칙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특히나 우리 사회는 창작 예술가들을 위한 사회적 인식과 재정적 인프라가 공고히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직업 예술가로서의 전망을 갖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술, 특히 그림이라는 장르가 너무나도 어렵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내 전시를 보러 온 지인들 중 대다수가 자신의 그림에 대한 무지를 토로하며 훌륭한 그림을 몰라볼까 두렵다는 격려 차원의 자성을 하였다. 혹자는 내게 그림에 가깝게 다가가는 방법을 묻기도 하였다. 일반인들 모두가 즐겁고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도록 내어놓은 창작물이 너무나 지적으로 어렵게 다가간다는 사실에서 나는 창작예술가들과 관객들의 소통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는 하였다.
2015년 4월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에서 위원장을 공모하였다. 마침 교수직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였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던 차에 나의 문화예술에 대한 비전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 싶어서 위원장 직에 지원하였다. 지원서에는 직무수행계획서 라는 것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고 나는 4대 비전 11대 전략이라는 문화예술위원회의 밑그림을 그려서 4월 15일에 제출하였다. 4대 비전은 정보기술과 문화예술 융합, 문화예술 국제교류 촉진, 국민 문화예술 인식 진흥, 지역 문화예술 특성화 등을 포함했다. 비록 서류 심사를 통과하지는 못했으나 문화예술 정책에 대해 나름 혁신적 전략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제안한 정보기술(IT)과 문화예술의 융합이라는 비전에는 4가지 방향의 전략사업이 담겨져 있었다. 첫 번째는 모바일 관객 사업이다. 여기서 모바일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휴대폰을 뜻하는 이동식 단말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움직이는’ 관객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모바일 폰의 급속한 보편화에 따라 다수의 국민들이 문화예술 작품을 모바일로 감상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이나 영화 등을 즐긴다. 앞으로 스마트 카 기술이 발전되어 무인주행 시스템이 완비되면 승용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모바일 관객 층으로 흡수될 것이 분명했다. 문화예술의 접근성을 높이고 예술가들 입장에서 관객 동원 효과를 증진하기 위해서도 모바일 관객 사업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방향의 전략 사업은 가상 공간 사업이다. 예술 창작자들이 필요로 하는 퍼포먼스나 전시 공간의 온라인화를 추진하는 사업을 말한다. 이는 모바일 관객 사업과 연계하여 예술작품 수요 공급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세 번째의 사업은 관객참여 공연 인프라 구축에 관한 내용이다. 오프라인 예술 공간에 얼굴이나 홍체, 혹은 동작 인식 센서를 부착하여 관객들의 반응이 피드백 되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항상 관객들의 솔직한 반응을 갈구하던 나를 돌아보며 이 사업은 협력적 문화 콘텐츠 생산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네 번째 사업은 바로 창작자-관객 네트워킹에 관한 것이다. 이 사업만큼은 내가 이미 2010년도에 발표했던 소셜콘텐츠론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반드시 나의 손으로 가장 먼저 사업화하고 싶은 아이디어이다.
내가 현재 개발하고 있는 대화형 문화예술 관람 SNS에는 다국어 번역 시스템도 장착을 할 계획이다. 나는 모바일 폰에 장착된 다국어 번역 시스템이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로 대화자들 사이에 공유하는 관심사가 없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사실 수많은 메시지 기반 SNS가 그리 글로벌화되지 못하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언어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 나도 동의하지만 설사 다국어 번역 시스템의 개발로 언어의 문제가 해결된다 한들 국경 없는 친교가 조성되기 힘든 이유로 나는 공유하는 관심사의 부재, 혹은 공통된 목적의 부재라고 본다. 수 십 년간 친분을 유지해온 사이에서도 목적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생소할 때가 있는데 생전 얼굴도 못보고 언어도 다른 외국인들과 활발한 대화를 나눌 목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경을 초월하여 향유되는 문화예술이라면 이 같은 목적지향적인 글로벌 대화를 가능하게 하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기술적으로 볼 때 이처럼 목적과 공간에 최적화 된 SNS는 비단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데에서 나아가 판매하고 유통하는 전자상거래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많은 개발자들이 소비자들의 SNS 이용동기를 관계의 확장에 두고 있다. 그래서 팔로우어의 숫자와 친구의 숫자 등이 관계망의 중요한 지표가 되고는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애용하고 있는 SNS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수박 겉핥기 식의 표면적 관계형성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소비자들은 단순한 수다를 원한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대화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의 SNS가 깊이 있는 대화를 촉진하는 데 과연 얼마만큼 기여했던가를 생각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영어수업에 대한 단상
누구나 국제경쟁력이라는 실용적 가치를 이야기한다. 영어수업을 통해 꾸준히 영어실력을 키워야 국가 간 의존도가 심화되는 글로벌 사회에서 외국인들과 경쟁 또는 협업을 하기 위해서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영어수업이 필수라는 것이다. 글쎄 틀린 말은 분명 아닌데 이게 전부인양 얘기하게 되면 그만큼 한국어 사용을 소홀히 하게 된다 하여 요즘 젊은이들이 한글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부족하다, 한글의 미래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는데.. <Going Solo>라는 미국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에릭 클리넨버그(Eric Klinenberg)가 쓴 책이다. 저자의 주장은 이러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미혼, 이혼, 사별 등으로 인해 싱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4배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며 유럽 다양한 국가들과 호주 및 일본의 예까지 들어간다. 이 책에서는 언급이 되진 않았지만 각종 언론에서 보도되었듯이 한국도 급증하는 이혼율 등 혼자 살아가는 인구가 급속히 늘어간 국가에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독신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현상에 대해 기존 학자들은 대부분 공동체성의 와해로 진단을 한다.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자 퍼트남에 따르면 그 유명한 메타포 “Bowling Alone”을 통해 표현하듯이 현 시대 미국인들의 삶은 개인주의가 극대화되고 공동체적인 삶은 소멸되어 간다고 개탄한다. 비단 퍼트남 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대가들 대부분이 이러한 진단에 동의를 하며 각종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그런데 클리넨버그는 조금 다른, 아니 확연히 반대되는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의 주장은 이러한 독신남녀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회변화–즉, 여성 권리의 급격한 신장, 네트워크 통신기술의 발전, 평균수명 연장과 고령화 사회–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라이프스타일이 재편되어 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독신들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 각종 공동체적 삶에 참여하는 독신들의 행동 등 방대한 리서치 결과를 제시하기도 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같은 현상을 두고 이렇게 다르게 즉,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진단할 수가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책의 저자는 분명 독신이 아닌 두 자녀를 가진 한 가정의 가장이므로 절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옹호하려는 동기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또한 책의 결론이 독신의 삶을 미래지향적 모델로 주장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기존의 학자들이 한결같이 싱글족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현상을 두고 위기로 진단하여 섣부른 가치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어 독신들을 사회공동체 붕괴의 주체 또는 피해자로 스티그마를 붙인데 반해, 클리넨버그의 관점은 이러한 현상에서 바로 미래를 읽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Together Alone”이라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전자와 같이 위기로 진단, 네거티브하게 접근하게 되면 그에 대한 처방은 위기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되고 결론은 결국 제로로 되돌아온다. 반면 후자와 같이 긍정적인 마인드로 현상을 진단하게 되면 제로에서 시작하여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모색, 일정 정도의 플러스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해결책이 나오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즐기는 젊은이들, 여럿이 어울리는 카페에서도 각자 스마트 폰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화된 삶의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배우자와의 불화로 결국 헤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도, 혹은 보다 자유롭고 자기 의존적(self-reliant)인 독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는 잠재적 인구이다. 이들을 두고 기성세대들은 요즈음 젊은이들의 삶이 파편화 되어간다고 애석해 하고 있지만 이를 그저 네거티브하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사회 속에서 새롭게 재편되는 삶의 한 단면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과도기의 모습으로 말이다.
사족이 너무 길었다. 영어수업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려는데 얼핏 딴 길로 흐른 것 같지만 <Going Solo>라는 책에서 저자가 취한 태도를 필자도 똑같이 취하고 싶은 욕망에서 책 소개를 장황하게 해버렸다. 영어는 일종의 글로벌 언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로빈슨 크루소우처럼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야 크게 중요하지 않겠으나 (사실 고립된 삶을 살수록 글로벌 언어는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도 얼핏 들긴 하지만), 클리넨버그의 관점을 빌어 영어 사용이 새롭게 재편되는 삶의 방식이라고 진단한다면 우리는 한글 실종을 우려하여 영어 수업을 격하시킬 것이 아니라 보다 바람직한 방향의 영어 수업과 커리큘럼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경쟁력이라는 실용적 가치보다 영어 수업이 필요한 이유로 우선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창의력 증진과 관련해서이다. 영어와 같은 외국어가 인간의 창의력 계발에 미치는 효과는 아마도 언어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논리는 이러하다. 우리의 뇌 속에는 모국어로 습득된 수많은 개념들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학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모국어의 소통이 용이할지 모르나 외국어로 자극을 주었을 때 보다 더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습과 창의력은 어떤 면에서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학습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규범 체계 속에 순화되어 스스로가 알고 있다고 지각(perception)하는 것이다. 창의력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각이 최대한 약화되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인지적 반작용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가능해진다. 상대적으로 외국어는 이러한 인지과정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국어와 같이 뚜렷이 형성된 개념체계가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국어와 외국어를 잘 혼합한 제대로 된 커리큘럼만 수립한다면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영어 수업이 학습 증진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필자가 영어 강의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볼 때 콘텐츠의 효과적인 전달만 전제가 된다면 학생들의 학습 수준 역시 한국어 강의 때와 비교하여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영어 수업이 학습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인지구조적 논리보다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 수업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필자는 2010년부터 학부와 대학원 전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고 있다. 강의와 토론에 방점을 두는 영어 수업이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뉴스에 대해 공부하는 저널리즘을 가르치는데 왜 굳이 영어가 개입되는가 혹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변화하는 저널리즘의 지형을 제대로 이해할 때 의문이 해결될 수 있기에 다음 기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설명을 하고자 한다. 간단하게만 이야기 하면 네트워크의 발달과 플랫폼의 다양화에 따라 뉴스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할 정도로 저널리즘의 지형이 변하고 있고, 이제는 글로벌화된 새로운 언론의 미래가 열려 있다는 정도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여하튼 필자가 우리 학생들과 영어 수업을 통해 획득한 경험에 바탕 하여 이야기를 하자면, 언어는 철저히 자신감과 솔직함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다소 수줍어하던 학생들에게 영어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영어를 못하는 것 때문에 창피함이나 열등감을 갖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였다. 그 결과 학생들은 투박해도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개중에는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유창한 네이티브들도 몇 명 있었으나 필자의 학생들에 대한 평가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생각의 질(quality)에 맞춰 졌다. 클라스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으나 요즈음 같은 경우 필자가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면 한 번에 열 너 댓 명이 경쟁적으로 손을 들고 먼저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렇게만 적극적이라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 단일민족 최대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인도인들보다 훨씬 경쟁력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MIT 인지과학 교수 스티브 핀커가 쓴 <언어본능>이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네이티브와 같은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는 수화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태어나면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성장기를 다 지나 수화를 배운 일반인들은 그 표현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강해서 네이티브 수준의 소통 능력을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영어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 치면 깊은 열등감에 빠지곤 한다. 이런 태도는 영어를 너무 높게 보는 사대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럽의 사람들은 문법도 엉망이고 어휘력도 별반 높지 않지만 표현력에 있어서는 나름 뛰어난 영어 실력을 보여준다. 영어에 대한 열등감과 사대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모방의 행위이긴 하지만 행동이나 바디랭귀지, 불필요한 연결어까지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적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최대한 명확히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일 뿐 미국화(Americanized) 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한 모습이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심할 경우에는 오히려 귀에 거슬리기까지 하다. 다행히도 우리 학생들은 필자의 질문에 눈동자를 굴려가며 열심히 상상하였고, 그 내용을 정갈하고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논리적으로 표현하였다. 진정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창의적으로 열심히 학습하고, 다른 동료 학생들과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보완해주기도 하는 이 영어 토론식 수업을 통해 진정으로 성장한 것은 필자 자신이었다. 누군가 인생에서 배울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했던가. 수업 중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여느 기성학자 못지않은 진취적이고 성숙한 시각이 표출되어, 필자가 5년에 걸쳐 얻은 석,박사학위와 매년 자의 반 타의 반 열심히 연구한 탓에 얻은 학문적 이론의 기초가 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였다. 이처럼 필자의 영어 수업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는 결국 Going Together가 아니었나 싶다.
사회격과 커리어 코치
지난 5월에 출간한 <와인독백>을 통해 나는 사회격(societality)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국가적 자원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시기 질투하여 도태시키지 말고 기꺼이 박수쳐 줄 수 있도록 전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개성에 기반을 둔 너그러운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사회격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제도적인 차원을 통해 견인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제도 중 하나는 회사의 커리어 코치 제도였고 아래와 같은 기고문을 언론에 게재하였다.
[YTN플러스 기고/2015. 2. 13] 출세 못한 ‘모짜르트’들을 위한 항변
창조적 리더십을 표방하는 21세기 대표 기업들의 공통된 조직경영 특징은 자율과 즐거움의 추구이다. 작년 발표한 삼성전자의 자율출퇴근제가 구글과 애플을 비롯한 대표적 IT기업에서는 이미 일반화 되어있다는 평이다. 또한 즐거움이 생산성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수많은 스타 CEO들이 언급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율과 즐거움의 추구가 잘못된 방향은 아닐진대 이 시점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 위한 우리가 한 발 더 앞선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다음과 같다: 과연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한 명의 천재가 낳는 경제적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어 있다. 현재 한국은 IT분야 천재 CEO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가 나오기를 열망하고 있지만 실상 그 단초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성숙하지 못한 조직문화에 있다. 어차피 조직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출세하는 사람과 낙오되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이 조직이다. 그런데 그 출세라는 것이 말 그대로 실력 하나만으로 평가된다면 문제없겠지만 이는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유능한 구성원을 질시하는 자들의 음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 양상은 명확하다. 나쁜 평판을 만드는 것. 잘난 척을 한다는 둥, 성격이 기이하다는 둥, 온갖 음해성 발언을 하며 ‘스티브 잡스’를 왕따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러한 음해성 평판이 만들어지는 ‘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평판의 ‘제도화’에 있다. 최근 기업 인사에서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 바로 평판이다. 일부 기업들은 조직구성원들의 평판조회를 공식화 하고 있기도 하다. 인성, 성격, 품성 등을 인사고과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살리에르’들의 부정적 평판 만들기가 제도화된다는 점이다. 평판이라는 것이 주관적 의견이다 보니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혹은 교묘하게 틀 지워진 부정적 소견들이 특정인에 대한 음해성 평판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제도화되어 유능한 인재들을 낙오시키는 것이다. 어차피 인사는 인사권자에게 있기에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CEO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인사시스템이 낙후된 국가의 기업들일수록 소위 말해 ‘빽’이 판친다. 여기에 파벌과 줄 세우기 문화까지 가세해 인재들은 소외되어 가는 것이다.
아이하라 다카오라는 일본의 인사관리전문가는 그의 책에서 유교의 오경 중 <서경>의 말을 인용하며 공과 덕은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평판의 제도화를 비판하는 것이 덕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창조적 아이디어로 묵묵히 일하는 이 시대 진정한 덕장들이 오히려 간교한 술수와 음해로 도태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객관적 지표를 통해 성과를 평가할 것. 그리고 CEO들이 조직구성원들과 밀착하여 소통함으로써 저평가된 실력 있는 인재들을 발굴해 낼 것. 2000년대 초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일본 닛산자동차의 CEO ‘카를로스 곤’은 사내 커리어 코치(career coach)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발굴하는 업무를 맡겼다.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는 이미 정착된 커리어 코치 제도가 인성과 성격 등 업무성과 이상의 요소들에 주목하여 진로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점을 볼 때 평판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다. 하지만 닛산자동차의 경우 특이한 점은, 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상사와의 불화로 저평가되어 실력을 펼치지 못하는 사원들을 발굴하는 업무를 주로 수행하였다고 아이하라는 전한다. 소위 말하는 왕따 문화를 방지하고 평판의 제도화를 합리적으로 구현한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CEO들이 창조적 리더십을 표방하며 특별한 처방전을 내놓으려 하고 있지만 인사시스템만 합리화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스티브잡스’를 발굴할 수 있다. 아울러 인재에게 있는 그대로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성숙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세하지 못한 ‘모차르트’의 항변에 귀 기울이며 던져야 할 질문, 우리는 진정 인재를 키우고 있는가?
휴머니스틱 IT 기업을 창업하며
유능한 인재는 회사의 자산이다. 돈과 같은 가치를 지닌 회사의 자산이다. 한 명의 인재가 낳는 경제적 가치를 생각할 때, 불공정한 인사시스템으로 다른 제3자에게 이득을 주고 인재를 내치는 행위는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는 행위라고 본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인재의 등용문이 온갖 비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서 유능한 인재의 좋은 아이디어들은 빼앗고 배경 좋고 힘있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의 앞날에 무슨 미래가 밝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청년실업 문제도 마찬가지다. N포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 진데 대해 어디를 가도 거시적 경제만을 탓하고 있다. 절대 아니다. 공정한 인사 평가를 실현하려는 진정성 있는 자세가 부재한 한 아무리 경기가 좋다 한들 청년실업의 문제는 영원한 미궁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교수를 그만두고 1인기업을 창업한 이유는 나 스스로가 사회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개성있는 삶을 그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내심 아이디어 권력을 발휘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그래서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듯이 눈에 안보이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를 발명하고 싶어서다. 아이디어는 눈에 안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기에 빼앗기기도 쉽고 일단 빼앗으면 컴퓨터를 다루는 엔지니어가 오히려 더 현실적인 도움이 된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최초로 생산한 자가 없이는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그 본질이다. 아이디어란 그걸 표현하는 단어 몇 개도 아니고 컴퓨터 기술로 응용되는 상품도 아닌 바로 그 생산자 자체임을 모르는 우매한 이들에게 보란듯이 깨달음을 주고 싶다.
내가 휴머니스틱 IT기업을 창업하는 또 다른 이유는 IT를 통한 글로벌 복지 실현을 위한 차원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정보복지론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2010년 6월, 나는 미국 록펠러 재단에 연구지원금을 신청하였다. 당시 내가 수행하려던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국내의 지원이 여의치 않아 나는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내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던 SNS와 대화적 뉴스 등을 기반으로 하여 뉴스 프론티어십으로 요약되는 지원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통해 IT를 통한 글로벌 복지를 제안하였다. IT 인프라가 빈약한 저개발국가나 제3세계 국가들이 정보적 부(informational wealth)를 누릴 수 있도록 선진화된 IT 국가들이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국가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 역시 이러한 정보적 부에 입각해서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 게이츠 재단과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등이 비슷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였는데, 더 많은 IT 기업들이 저개발국가들도 정보적 부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솔직히 학벌과 금권과 인맥으로 촘촘하게 얽혀서 불편부당한 평가가 관행이 된 이 사회에 대해 개탄하고 있는 내 자신이 무척 안쓰럽다. 그래서 나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가 쓴 책이 미치는 독자의 수가 몇 명이나 될지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독자라도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나는 위안을 받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던 운 좋은 사람이다. 나보다도 훨씬 더 억울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비일비재할 것이다. 내 말이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책을 기획하고 나의 아이디어들을 모아보면서 느낀 결론은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실망과 포기보다는 긍정과 도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마음과 열정을 가진 순수한 사람들이 그래도 어딘가에서 성실히 살고 있음을 나는 오늘도 느끼기에 끝까지 도전해 보고 싶다.